Articles Archive for Ma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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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갖고 있으며 오리건 주과 워싱턴 주에 있는 20여개의 시골학교에 다니는 약 500여명의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은 4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매년 공원과 관련된, 커리큘럼에 기반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공원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강과 숲의 보존,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 트레일 레크리에이션, 캠핑 및 야생 기술의 실제, 공원경력증명서와 서비스 배우기 등이 그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주니어 레인저(Junior Ranger)’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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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은 ‘숲’의 글꼴만으로 숲을 그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혀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 숲의 진경이다.
그런 숲을 건축한 헬렌 박의 현대적 정자다. 인간의 의지를 짓는 건축의 날카로움은 곧잘 서늘한 자연을 망가뜨려왔다. 이번 작품은 모음이 되어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를 함께 품었다. 열고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닫고 고립하는 장치가 되어버린 벽과 문의 기능을 해체했다. 숭숭 뚫린 벽과 문 사이로 ‘밖’이 넉넉하게 들어온다. 최소한으로 닫힌 ‘안’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닮는 자유를 사색하는 공간의 묘미를 만든다. 이것이 자연과 자유를 공존시켰던 우리 전통 누정의 정신이다. 자신 외에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는 근대문화와 달리, 자연과 관계하고 전통을 참조해 만든 ‘집 밖의 집’에서 더불어 사는 작은 세상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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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가 다니는 쿠퍼티노(Cupertino)시의 하이드(Hyde) 중학교 8학년(우리나라로 치면 중2) 학생들은 1년에 한번 요세미티국립공원에 현장학습을 간다. 의무적인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지원한다. 그러나 성적이 안 좋은(E나 F학점을 맞은) 학생은 지원하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올해는 3월 16일, 일요일에 출발하여 21일인 금요일까지 1백여명이 꼬박 일주일을 요세미티에서 보냈다. 숙소는 요세미티밸리 안에 있는 커리빌리지(Curry Village) 캠프. 시설도 매우 노후하고 숙소 내부에 샤워실도 없는 곳이다. 이곳을 참가비만 600불 이상 내고 참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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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빛은 깊은 그늘을 만든다. 도시는 빛의 마천루와 광장을 자랑한다. 하지만 생명은 그늘에서 오그라든 삶을 산다. 대표적인 공간이 지하도다. 본래 땅속은 죽어 가는 곳이다. 그런 곳에 삶을 담으면서도 더욱 외지고 음침하고 삭막하게 방치해 왔다. 작가 정원철은 그곳에다 죽음을 새겼다. 독존하려는 인간 때문에 죽어가는 생명들을 벽에다 그리고 길에다 이름을 새겼다. 딱정벌레·두우쟁이·말똥가리·곰보버섯 …. 그들의 소리를 음향으로 덧붙였다. 워크맨, 아날로그 휴대폰 등 인간이 만들고도 내친 것들도 함께 불러낸다. 죽은 공간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호명하는 행위는 음(陰)의 음(陰)을 찾는 강렬한 의식이다. 그것은 더불어, 느리게 사는 삶을 주문한다. 가끔은 뒤도 돌아보자고 요청한다. 뒤돌아봄은 ‘다시 그리고 함께’ 사는 공간을 만든다. 속도를 한번 꺾어 제목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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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도로가 사람들이 앉아 쉬고 비보이하는 성큰가든으로 바뀌었다. 차를 내친 길의 회복을 두더지도 축하한다. 그들도 무리를 지어 힙합을 켜고 리듬을 꺾는 춤을 춘다. 미대 대학원 학생이 도로에 그린 착시효과 나는 그림이다.
그냥 보면 도로를 얼룩덜룩하게 칠한 것인데, 정해진 시점에서 보면 땅속 놀이마당이 떠오른다. 치기 어린 그림이지만, 도시에 대한 꿈과 비평은 야무지다. 쉬고 놀고 ‘개갤’ 수 있는 도시는 최고 경지의 삶터다.
근대 도시는 놀이와 축제를 지워버렸다. 개미로 베짱이를 내친 것처럼 생산으로 ‘개갬’을 축출했다. 그래서 우리 도시민은 리듬과 색깔, 욕구를 다 잃어버렸다. 죽어서 산다. 놀이는 삶의 의미를 복원하는 근원적인 축제이자 작업이다. 젊은 작가는 답답한 일상의 벽을 뚫는 ‘지금, 여기’의 축제를 작업으로 요구한다.


